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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병' 경남창의대 지리산 항일투쟁 재조명

금산금산 2016. 8. 16. 19:29

'잊혀진 의병' 경남창의대 지리산 항일투쟁 재조명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 소장, 박동의 대장 등 활약상 소개








- 1907~1915년 1만여 명 달해
- 대원 3000명 이상 순국 추정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박동의(1867~1908) 대장 등

 1만여 경남창의대의 항일투쟁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리산 일대에서 항일투쟁에 나선 경남창의대 의병장들.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제공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정재상(51) 소장은 71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박동의 대장과 경남창의대의 항일투쟁 상황과 대원들의 생활상을 상세하게 공개했다.

정 소장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주택박물관 내 '진중일지'와 국가기록원이 소장 중인 일본 경찰이 작성한 '폭도에 관한 편책' 등을 근거로 박동의 대장과 경남창의대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경남창의대는 당시 일본군에게 '언제 어디서' 나타나 타격을 가할지 모를 공포의 대상이었다. 경남창의대는 1908년 3월 12일 지리산 부근 덕산에서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같은 해 3월 26일 밤 11시 산청주재소(경찰서)를 습격하고 건물을 불태웠다.

다음 날에는 '단성군 신등면에 36명의 폭도(의병)가 총기를 휴대하고 나타났으며 수괴(의병장)는 박모(박동의)'라고 일본 경찰은 보고했다.

이 외에도 경남창의대는 1908년 4월 16일 단성읍내 주재소를 습격해 건물과 서류를 불태웠고, 산청군 두량곡과 대원사 부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십 차례 교전해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돼 있다.

박동의 대장이 이끈 경남창의대는 1907년 7월 일제의 군대 해산령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군인 일부와 의병들이 결성한 전국 13도 창의대 중 하나였다.

박동의 대장은 1908년 10월 산청군 덕산에 주둔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된 뒤 순국했다.

박동의 대장은 일본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당사자임에도 항일투쟁 기간이 너무 짧아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그래서 '잊혀진 의병장'으로 묻혔다.

정 소장이 이날 공개한 경남창의대 소속 항일투사 1000여 명의 생활은 '충만한 애국정신'과 '유비무환' 그 자체였다.

경남창의대는 하동 쌍계사와 구례 칠불사, 산청 법계사 등 지리산 일대 3개 사찰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다.

3곳으로 나눈 것은 게릴라전을 펼치기 좋고 잠복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정 소장은 설명했다.

대한제국 군대 소속이던 군인들이 합류한 덕분에 이들은 화승총과 지장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당시 의병들은 미국과 프랑스 등의 선교사를 통해 단총(권총) 등 무기를 사들였고, 습격 때 일본군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다.



'소모장'이란 불리는 의병장은 청년을 상대로 시국 강연을 하고 격문을 배포해 의병을 모집했다.

이렇게 모집한 의병들은 전직 군관 출신인 '교련관'이란 의병장이 훈련시켰는데, 이들은 고종 32년 지방수비를 위해 설치한 최초의 근대적 군대인 진위대 소속으로 사격과 게릴라전 방법 등을 가르쳤다.

정 소장은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경남창의대가 1만여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3000명 이상이 경남창의대 활동 중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 소장은 덧붙였다.

김인수 박현철 기자phc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