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문화현장] 망각 강요하는 사회…문학은 말한다 기·억·하·라·고
소설, 기억과 치유를 말하다
한쪽 눈이 멀었던 거다.
그건 물 위에 떠올라 있는 눈에 보이는 얼음덩어리였어.
물 위에 떠 있는 것보다 더 큰 엄청난 덩어리가 물속에 잠겨 있다는 걸 몰랐던 거지.
물 위에 떠 있어서 내가 보았던 얼음이 흰 블라우스나 축음기판이었다면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일본이
군함도였고, 하시마 그 탄광이었고, 미쯔비시라는 조선소에서의 나날이었던 거야.
그리고 이 미친 전쟁, 저 광기와 악의 거대한 덩어리까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이를 갈던 친일파 아들새끼, 그게 나였다.
떠올라 있는 얼음만을 보았지 물속에 잠긴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보지 못하던, 바로 나였어.
'군함도' 2권 415쪽, 등장인물 지상의 독백
왼쪽부터 '개·늑·시' 김경욱 작가, '군함도' 한수산 작가, '베개를 베다' 윤성희 작가 |
# '개·늑·시' 김경욱 작가
- 의령 우순경 사건의 희생자들
- 각자의 사연을 하나씩 풀어내
- 그들의 삶과 꿈, 기억으로 치유
# '군함도' 한수산 작가
- 일제강점기 하시마 조선인 징용
- 감정적 대립 구조 서사 보다는
- 차분히 기록하는 형식 취해
# '베개를 베다' 윤성희 작가
-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 이토록 무책임한 관용어구보다
- 아픔·상처 공감하길 항변하다
70대에 접어든 작가 한수산이 지난달 말 세상에 내놓은 장편소설 '군함도'(창비 펴냄)와
40대 소설가 김경욱이 지난 4월 펴낸 장편소설 '개와 늑대의 시간'(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들은 우리 사회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를 새로운 각도에서
새삼스럽게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이니 이제 그만 잊으라, 가만히 있으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로도 사건과 사고는 계속 우리 사회에서는 일어났다.
큰 상처를 동반한 이런 비극 앞에서 적극적으로 기억하고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해원(解冤·원통함을 품)하자는 흐름이 있는 반면, 그만 잊고 덮고 가만히 있어야 문제가 풀린다는 목소리도 있다.
빼어난 소설인 '군함도'와 '개와 늑대의 시간'은 이런 상황에서
"기억하자" "기억해야 풀린다"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진다.
하지만 '하나하나 들춰서 상처를 헤집자'는 태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사건 자체만 다루거나
사실에만 매몰되는 역사기록형 소설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바로 이 점이 차이이고 성취다.
■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다
김경욱 소설가의 '개와 늑대의 시간'은 부산 경남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남은
'의령 우순경 사건'을 담는다.
1982년 4월 26일 밤 경남 의령군의 작고 외진 마을에서 27세 현직 경찰관 '우순경'이
무기를 탈취해 마을 주민을 무차별로 살상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확인된 사망자는 56명.
밤사이 8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이 사건은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소설가로서도 다시 들춰내기 어려운 대상이다.
고통이 따르고 주저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다.
김경욱 작가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지금껏 우순경 사건을 바라보고 기억하던
우리 사회의 낯익은 관점과 주제를 바꿔버린다.
흔히 저널리즘이 취하는 방식인 "○월 ○일 ○시 사건이 일어나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치고…"
하는 식의 접근법이 아니다.
작품 안에서 작가는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듣고,
그들이 꾸었던 꿈을 기록하며, 이들이 남긴 삶을 기록한다.
방향을 이렇게 바꾸자, 졸지에 희생된 22세 전화교환원 손영희가 미국 아이오와에 사는 수잔 여사(수잔 여사의 아들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와 나눈 '해외펜팔'이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소통과 대화로 살아난다.
'희생자'로만 처리됐던 소년 고동배가 왜 야구를 사랑했는지 그의 꿈도 손에 잡힐 듯하다.
이 소설은 흔히 '희생자'라는 낱말로 뭉뚱그려지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주인공으로 올려세워 숨결을 불어넣는다. 작가가 택한 해원과 치유의 방식은 기억이다.
■ 왜 27년간 '군함도'에 매달렸나
작가 한수산의 장편소설 '군함도'는 5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 2권으로 이뤄졌다.
그는 "'군함도'를 완성하기까지 27년이 걸렸다"고 밝혔다.
그 분량 때문에 '군함도'를 처음 잡을 때 부담감이 올 법도 하다.
'그동안 꽤 봐왔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수난사를 다룬 무거운 소설 아닐까' 하는
선입견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안 그렇다.
소설은 뒤로 갈수록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평화와 인간에 관한 성숙한 관점을 보여준다.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에게 펼쳐진 지옥이었던, 일본 나가사키현의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을 주요 무대로 한다.
침략과 유린의 증거와 기억이 선명한데도, 일본의 기획에 따라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돼
한민족의 분노를 산 바로 그 섬이다.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을 다룬 문학작품이 이미 많이 있음에도, 작가 한수산은 군함도의 기억을 기록하고
되살리는 데 27년을 썼다.
소설 '군함도'는 그 자체로 쓰라린 상처를 세세히 낱낱이 기억함으로써 치유로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작가 한수산은 이 소설의 결을 단순히 민족주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는 쪽으로 짜지 않았다.
'일본놈은 죄다 나쁜 놈'이라는 감정적이고 강력한 대립 구도를 세우는 대신, 있는 대로 찬찬히 보여주는
흐름이다.
그렇게만 해도 분노해야 할 것, 용서할 수 있는 것, 화해를 위해 필요한 것을 가려낼 수 있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진다.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의 아수라장에서 조선인들이 펼치는 우호의 활동, 조선과 일본의 낮은 백성끼리
주고받는 도움 등도 인상 깊다.
■ 소설가 윤성희의 한 문장
지난 4월 말 출간된 작가 윤성희의 소설집 '베개를 베다'(문학동네 펴냄)에 실린 단편소설
'가볍게 하는 말'에 나오는 한 대목은 매우 인상 깊다.
상대의 상처와 아픔을 기억하고 공감하는 순서도 거치지 않은 채
"이제 그만 잊으라" "덮으라" "가만있으라"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조용히 웅변한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고모는 손자에게 몇 년 전에 죽은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깃집에서 십 년을 넘게 같이 일을 했던 동료였는데 위암 말기가 되어서야 병을 발견했다.
자식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결혼을 안 해 장례식장은 문상객이 별로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넋을 놓고 우는 친구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모가 손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 고모는 손자에게 말했다.(29쪽)
체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성의 없이 하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 것을. 안아주는 게 먼저란 것을.
조봉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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