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문화현장]'거장은 어떻게 지역을 빛내나' 김해 서예가 범지 박정식
[문화현장] 고향의 뿌리를 폭포수처럼 펼쳐놓은 한 예술가의 공력
- 김해 묵방마을서 태어난 토박이
- 서예대전 최연소 대상 수상이후
- 고향서 묵묵히 글만 쓰며 활동
- 수십년의 세월 쌓여 거장으로
- 10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회서
- 김해를 담는 작품 해보자 생각
- 압도적인 대표작 '가락국기'부터
- 금릉팔경 구지가 연자루 등 작품
- 28일까지 김해문화의전당서
'가락국기(駕洛國記)' 앞에 섰다.
사람을 압도해오는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보다 뛰어난 힘이나 재주로 남을 눌러 꼼짝 못 하게 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은 낱말 '압도하다'의 풀이다.
어쩌면 이렇게 명쾌하고 정확한가! '가락국기' 앞에서 꼼짝 못 하고 멈춰 서 있게 된 심사를
한 치 빈틈 없이 표현해줬다.
사전의 뜻풀이를 읽고 살짝 감동한 건 무척 오랜만이다.
김해의 범지 박정식 서예가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쓴 자기의 작품 앞에 섰다. 4700여 글자, 너비 15m에 이른다. |
4700여 자에 이르는 글씨를 가로 70㎝ 종이 21장에 써내려간 뒤,
이를 이어붙여 너비 15m로 펼쳐 전시한 규모와 공력에 압도당하는 걸까?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의 글씨체 느낌을 살려 쓰면서도 본인의 개성을 반영해
소박하고 단출한 맛을 낸 형식미에서?
가야 역사의 본고장 김해에서 가야 시조 수로왕 이야기를 담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제대로 예술에 접맥했다는 내용의 측면에서?
그렇게 바쁘게 머리가 돌아가고 있는데 어느새 곁에 온
서예 거장 범지(凡志) 박정식(54) 씨가 태연스럽게 한마디 했다.
"서예가로서는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록했다'는 의미는 있겠지요."
이게 무슨 말씀?
작품 앞에서 긴장했던 감상자의 마음 한 구석에서 쨍그랑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게다가 범지 박정식이 누군가?
바로 이 '가락국기'를, 이 역작을 쓴 당사자다.
약간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 어떤 뜻에서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본인 작품을 "별것 아닐 수 있다"고 설명하는지 물었다.
그의 답변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이러했다.
예술로서 서예와 서화는 다른 장르와 다르지 않게,
창의적인(기존의 관행·관념을 깨고 새로운 것을 구현해 낸다는 뜻이다) 성취를 이룰 때 '높은'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가락국기를 그대로 쓰는 것은 그런 창의적 성분의 함량은 낮을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서예가로서' 큰 의미는 부여하기 힘들다는 귀결이다.
범지 박정식 서예가와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 묵방마을에서 태어난 김해 토박이
구지가를 서화로 표현한 작품. |
그를 최근 만난 곳은 경남 김해시 김해문화의전당(사장 이명자)
윤슬미술관 제2전시실이었다.
김해문화의전당이 단단히 마음먹고 기획한 '2016 아티스트 인 김해 전'에서 그를 초대해 '범지 박정식 전'을 지난달 8일 시작했다.
이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이어진다.
김해 예술계에서 '범지 선생'으로 두루 통하는 그는
상동면 묵방마을에서 태어난 김해 토박이다.
초등학교 때 붓을 처음 잡았고, 고등학교 때 '글만 쓰면서' 살아가는 삶을 생각했으며, 20대에 사실상 전업 서예가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1994년 그는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큰 영예를 안는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만 32세밖에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사상 가장 나이가 어린 대상 수상자였다.
"일찍 큰 상을 받아 그때는 실감이 잘 안 났고, 오히려 부담이 돼
방황한 기간도 있었지요.
대상을 받고 전시에 초대되고, 글씨와 그림으로 살아가는 서예인의 길에 들어서면서 '김해를 떠나지 말고 지켜야지' 하는 마음이 싹튼 것 같아요. 김해에서는 차산 배전 선생, 아석 김종대 선생, 우죽 배병민 선생처럼
영남 서화의 맥을 잇는 분들이 나오기도 했지요."
이번 '아티스트 인 김해 전'은 그의 10번 째 개인전이다.
단체전에도 10여 차례 참가했으며 크고 작은 전국 서예대전에 심사위원이나 운영위원으로 숱하게 참여했다.
김해 은하사 범종루, 문학인 가산 김종출 선생 문학비, 국립김해박물관 가야누리, 김해읍성 북문인 공진문,
가야역사테마파크 태극전 상량문 등의 휘호가 그의 글씨다.
"글씨와 그림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제3의 영역으로 튀어오르는 것.
거기서 발현되는 창조력. 이런 것들이 왔다갔다하면서 내 작품을 이루기를 바라죠.
그런 작품을 하고 있고요."
예스럽고, 형식을 중시할 것 같은 서화가의 내면이 이토록 '새로운 것'과 창의적 아름다움을 향한 실험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 했다.
■ '지독한 루틴'에서 창의성 나온다
범지 선생이 이 같은 자기의 미(美)적 지향을 작품에 구현하기 위해 매
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기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우직하고 튼튼하게 글씨를 다지고 그림을 익혔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뜻하는 오체에 모두 능하고,
한학자 허권수(경상대 한문학과) 교수와 인연을 맺고 20여 년째 한학과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날마다 같은 시간에 집 앞 김수로왕릉을 산책하고,
지금도 임서(다른 서예인의 글씨를 쓰는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수행이 참 중요해요."
그가 서예를 가르치는 장소인 김해시 가락로 125번길의 범지서화연구실의 이름은 청우마묵헌(晴雨磨墨軒).
맑은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먹을 갈고 서예에 정진한다는 뜻이다.
"루틴(일상에서 반복해서 꼭 해야 하는 일)"을 지독하게 지키지 않으면 새로워질 수도 없다는
예술의 이치는 오묘하다.
자! 이제 다시 윤슬미술관 제2전시실 '범지 박정식 전'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이번 초대전을 준비하면서 마음 먹었다.
"전시 제목도 '아티스트 인 김해'잖아요. 김해를 생각하는, 김해를 담는 작품을 해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 전시에는 김해를 담은 서화가 많다.
'가락국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림과 글씨가 만나 창조적인 조형미를 뿜는 '파사석탑도' '구지가' '연자루',
옛 김해의 풍광을 노래한 '금릉팔경' 등도 내걸렸다.
범지 특유의 서화 정신이 빛나는 작품도 많다.
추사체 느낌으로 쓴 글씨 '노경(老境')의 그윽하고 깊은 느낌, 최명희 대하소설 혼불을 표현한 '혼불',
깊이 품어주는 사랑의 감각을 잡아낸 '애(愛)', 그가 추구하는 미적 지향의 실마리를 담은 '일도낭화(一棹浪花)'.
서화의 세계가 이토록 다채로운 꽃 세상인 줄 비로소 느낀다.
■ '가락국기' 글씨는 김해의 명물
돌고 돌아 다시 '가락국기' 가 보자.
무릇 예술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감상자의 것이 된다.
향유하는 사람이 그 작품을 보고 '나름대로' 느낄 때에야 그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가락국기' 앞에서 범지 선생은 "예술적 의미보다 기록의 의미가 더 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지만 전시회 방명록에 한 관람객은 이렇게 썼다.
"'가락국기'가 이과수 폭포보다 더 멋지다."
사람들은 고향 김해의 뿌리에 얽힌 이야기 '가락국기'를 폭포수처럼 펼쳐놓은
범지 박정식의 치열한 예술정신에 감동하고 고마워한다.
이것이 거장이 지역문화를 빛내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김해의 어느 멋진 장소에, 서예로 다시 태어난 '가락국기'를 그대로 새겨,
전대미문의 조형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다.
조봉권 기자 bgj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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