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도 문화유산] <상> 아직 우리 곁에 있다
일제가 만든 인공동굴…방치 속 일부는 거주지·식당 활용
- 용두산 동굴 군사시설 유력
- 동굴 4개 발견된 동광동은 조선총독부 부청 있던 자리
- 동광동 집 아래 거대 방공호, 광복 후엔 40세대 살기도
- 범일동·좌천동엔 주점 유명
- 장자등·가덕도 포진지 등 제대로 관리·조사 안돼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에 대해 대부분 시민은 존재 자체를 모른다.
일본에 의해 부산이 군사기지로 활용됐다는 사실도 낯설다.
아픈 기억을 외면하면서 역사가 단절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제가 만든 군사시설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으며
심지어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도 있다.
고통스럽더라도 '네거티브 문화재'로 분류되는 아픈 역사를 찾아서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공 동굴이 지난 18일 중구 대청동 용두산 공영주차장 뒤편 축대 공사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새롭게 드러나는 시설들
중구 대청동 용두산 공영주차장 뒤편 축대 공사장.
지난 2월 축대 보강 공사 중 이상한 시설이 일부 노출됐다.
콘크리트로 만든 삼각형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이어 3월에는 불과 10여 m 떨어진 곳에서 작은 구멍이 발견됐다.
그리고 지난 18일 흙더미를 치우자 마침내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
두 곳 모두 인공 동굴이었다.
이곳은 옛 동광국민학교(1921~1998년) 자리이다.
지난달 이곳에서 약 300여 m 떨어진 동광동에서도 동굴 네 곳이 발견됐다.
이 지역은 초량왜관 책임자인 관수가 머물렀던 관수가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부산부청이 있던 자리다.
네 곳 중 한 곳이 눈에 띄었다.
내부가 'T'자형으로 전형적인 터널 모습을 하고 있는데 끄트머리에서 벽을 두드리면 울림소리가 들린다.
이는 임시로 만든 벽 너머로 동굴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곳 주민들 사이에 이 동굴이 자갈치 시장 또는 용두산공원 너머로 연결된다는 소문이 나 있다.
동굴의 용도는 방공호 또는 문서고, 대피로 등으로 추정된다.
동아대 김기수(건축학과) 교수는 "동굴 주위의 석축을 보면 통상적인 마름모 쌓기가 아니라 상당히 공을 들인 바른층 쌓기로 이뤄졌다"며 "이는 근처에 중요한 건물과 인물이 있었다는 의미이며 동굴 역시 그 연장선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 여전히 사람이 산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중구의 한 인공 동굴 입구. |
중구 동광동의 한 3층 건물. 반지하 입구에 버려진 가재도구들이
널려 있다.
원도심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사람이 살다가 이사간 후 방치된 곳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철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온다.
문틈을 들여다보니 형광등이 켜져 있고 그 아래 냉장고도 보인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공 동굴이다.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
이곳에서 100여 m 떨어진 메리놀병원(중구 동광동) 자리에서 태어나
1969~72년 구청장 임명 동광동장을 역임했던 이영근(85) 씨는
이 동굴의 역사를 말해준다.
그는 "코모도호텔 인근은 예전 부산 요새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군인들을 위한 방공호를 많이 건설했는데
이 동굴도 그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충격적인 것은 동굴 규모다.
이 씨에 따르면 광복 후 귀환 동포가 동굴에 터를 잡았는데 6·25 때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많을 때는
무려 40세대가 거주하기도 했다.
이 씨는 "예전에는 20세대로 한 반을 구성했는데 이 동굴에 두 개 반의 주민이 살았다.
내부 공간을 판자 등으로 나눴다"고 설명했다. 이 동굴에 대해 중구 이춘호 문화관광과장은 "몇 년 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고 했지만 거주민 반대로 조사도 제대로 못 했다"며 "소유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구에서도 직접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가정집 부엌을 통해 들어가는 중구의 인공 동굴. |
이 동굴에서 100여 m 떨어진 세탁소 건물. 산복도로 계단 옆에 지은 건물 1층 가정집 부엌에 큰 구멍이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역시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이다.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내부 공간에는 쓰레기만 쌓여 있다. 집주인은 "30여 년 전에 집을 샀는데 전 주인이 방공호였다고 알려줬다. 그런데 지금은 사는 데 불편이 많아 조만간 집수리 할 때 입구를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동구 범일동의 동굴은 식당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동굴은 길이만 70여 m에 달한다. 해방 후부터 동굴 술집으로 인기를 끌었고 몇 년 전 식당으로 바뀌었다. 원래 2대에 걸쳐 장사한 주인이 따로 있지만 15년 전에 현 주인이 인수해 영업하고 있다. 동굴 안전진단은 주기적으로 받았으나 학계나 관청에서 정밀 조사를 한 적은 없다. 여기서 약 1㎞ 정도 떨어진 동구 좌천동에도 축대 아래 동굴 2개가 있다. 광복 후 2009년까지 동굴 주점으로 유명했지만 도로 공사로 일단 폐쇄됐다. 동구에서 주민제안사업으로 디자인 용역을 진행 중인데 문화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사라지거나 외면받는 역사
식당으로 유명한 동구 범일동 인공 동굴 내부. |
남구 용호동 장자등 포진지. 부산에 남은 군사시설 중 건립 시기와 용도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자료가 남아 있다. 이곳은 일제가 1930년 대한해협을 봉쇄하기 위해 6년 공사 끝에 만들었다. 당시 구경 410㎜의 엄청난 포가 배치됐고 똑같은 구경의 포가 대마도에 설치됐다. 장자등 포진지는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면서 본래의 입구가 사라졌다. 지금은 남구에서 관리하는 별도의 철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동굴 내부에는 예전 주민들이 사용했던 젓갈 보관통이 뒹굴었다. 남구는 지난 3월 또 다른 입구를 찾고 전체 규모를 가늠하기 위해 전문 업체의 도움을 받았지만 수확은 없었다.
군사시설 중 큰 규모는 태종대와 가덕도에 많이 남아 있다. 두 곳은 전략적인 군사 요충지로 한마디로 요새였다. 태종대의 경우 태종사 인근에서 탄약고로 추정되는 동굴 등이 발견됐지만 관리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내부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가덕도는 1905년 러일전쟁부터 요새로 구축돼 섬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군사시설이지만 그동안 체계적인 조사는 없었다.
# 부산 중구 역사 산증인 이영근 씨 증언 기록해야
- 김한근 소장 "생생한 자료"
김한근(왼쪽)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과 이영근 씨. |
지난 18일 부산 중구 일제강점기 군사시설 답사에 김한근(59)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과 이영근 씨가 동행했다. 김 소장은 부산 원도심 지역사 조사와 연구에서 부지런히 현장을 누비는 향토사학자로 이름이 높다. 함께 참여한 이 씨는 중구의 현대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산증인이다. 이 씨는 1931년 중구 동광동 현 메리놀병원 자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 부산 요새사령부가 진해에서 중구 영주동 동광동 일대로 옮기면서 삶의 터전을 잃었다. 해방 후 동광동장을 역임하는 등 오래 중구 지킴이 역할을 했다. 답사 중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이 씨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이 씨는 학계에서도 정확하게 지목하지 못하는 부산 요새사령부 위치를 알려줬으며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살아있는 정보들을 술술 털어놓았다. 이 씨는 코모도호텔 부근에 일본군이 바닥에 철도 레일을 깔아 각종 문서와 군수품을 옮겼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방공호를 구축했는데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이 씨의 기억은 중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김 소장은 서둘러 이 씨의 기억을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소장은 "이 씨의 일생을 구술로 정리한다면 본인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중구의 생생한 역사가 된다"며 "늦기 전에 이 씨 같은 인물들을 찾아서 구술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희국 유정환 기자 kuki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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