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반짝반짝 문화현장] 가을 '어느날' 나들이의 기록

금산금산 2016. 10. 7. 11:27

[반짝반짝 문화현장]가을 '어느날' 나들이의 기록




예술인 번개 문학기행…'어느날'(김용택 作) 詩의 그날처럼 아름다운 하루






- 조갑룡 씨가 기획·진행하고
- 이미도 씨와 손대광, 반미희, 최현주 씨 동행

- 김용택 시인 집 임실 들렀다
- 경남 하동의 이병주문학관 찾는 일정

- 시와 영화로 이야기꽃 피니
- 이만한 가을 나들이 또 있으랴


모든 일은 어느 날 일어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좋았던 어느 날들의 기억'을 끄집어내 무게를 달아보자.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살면서 수확한 행복의 총량이다. '어느 날들'은 날마다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매일 만나다 보니, 우리는 곧잘 그 어느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깜빡 잊는다. 우리가 그렇게 깜빡 잊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시인이다.

   
김 시인의 집 앞 개울가에 선 일행. 왼쪽부터 조갑룡 부산시영재교육진흥원장, 이미도 외화번역가, 김용택 시인, 한 사람 건너 뛰어 반미희 펌프하우스 대표, 문창룡 이리삼성초등학교장, 최현주 부산시교육연수원장. 사진가 손대광 제공

어느날 - 김용택



나는

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날의 일이고

어느날에 썼다.



-최근 나온 김용택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창비)에 수록


시인 김용택은 삶에서 어느 날들이 일으킨 많은 기적을 가만히 들려준다. 태어나고, 당신을 만나고, 시를 낳고…. 68세가 된 올해에야 그런 고마움을 알아챘다는 듯, 그는 이번 시집 첫머리에 이 시를 실어 '어느날'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마워! 내 삶의 어느 날들아" 하고.

■뚝딱뚝딱 문학기행 준비하다

   
김용택 시인의 집 서재에서 담소를 나누는 문학기행 참가자들.

"이름하여 '심심찮은 문학기행'입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김용택 시인의 집에 가서 김용택 시인을 만나고, 경남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이병주문학관을 찾아가는 것이 1박 2일간의 주요 일정입니다. 숙소는 전북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필봉농악전수관입니다."

가을의 어느 날인 지난 24일 오전. '심심찮은 문학기행'을 기획하고, 준비와 진행까지 도맡은 조갑룡 부산시영재교육진흥원장이 출발을 앞둔 일행에게 설명했다.

조 원장은 몇 달 전 지인들에게 "가을이 오면 문학 나들이를 가자"는 메시지를 띄우는 것으로 이번 문학기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영재교육진흥원에 종종 와서 창조적 상상력에 관한 특강을 하는 외화번역가 이미도 씨와 함께 하동의 이병주문학관을 다녀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미도 씨는 청소년 시절부터 이병주 소설에 푹 빠졌고, 이병주의 소설을 모두 읽었으며, 이병주 작가를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다 계획이 약간 커져 김용택 시인 집에도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갑룡 원장과 김용택 시인은 오래 사귄 사이이고, 김 시인이 고향 진메마을에 서재를 잘 갖춘 새 집을 지어 지난 4월 입주한 터라 집들이를 해야 했다. 열두 번째 시집도 갓 나왔으니 이만한 문학기행의 호기가 없다.

조 원장은 어느새 문학기행 기획자로 변신해 "회비를 송금해라" "좋아하는 음악을 알려주면 준비해서 차 안에서 틀어주겠다"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사서 가져가는 게 좋겠다"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연방 전하며 재바르게 뚝딱뚝딱 일하더니 드디어 이런 문자를 보냈다. 참가자 조갑룡, 이미도, 손대광 사진가, 반미희 펌프하우스 대표(미술), 최현주 부산시교육연수원장.

끼워달라고 졸랐다. 문학기행 갔다온 걸 자랑하는 기사가 아니라, 가을을 맞아 독자들께 좋은 나들이를 권유하는 기사를 꼭 쓰고 싶다고. 이병주 작가는 국제신문 주필이자 편집국장을 지낸 '선배'이신데 이 기회에 꼭 가봐야겠다고.

■진메마을 김용택 시인 집에서

   
진메마을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는 문학기행 일행.

그렇게 가을 어느 날의 문학 나들이가 시작됐다. 등단 34년째를 맞은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을 섬진강 가에서 만나고, 23년 동안 '굿 윌 헌팅'부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외화 520여 편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미도 씨와 함께한 문학기행은 내용이 풍성할 수밖에 없었다.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일행을 맞아준 김용택 시인은 갓 나온 시집에 얽힌 이야기보따리부터 풀었다. "시집 제목을 '어느날'이라고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창비출판사에서 일하는 박준 시인이 '울고 들어온 너에게'로 하면 어떻겠냐는 거예요. 가만 생각해보고, 이쪽저쪽 반응을 알아보니 좋겠더라고. 시집 나온 뒤로 제목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여기서도 김용택 시인이 '어느날'을 얼마나 공들여 쓰고 깊이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시집에서 눈길이 끌리는 작품은 짧은 시편들이다. '밤새워 운 /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 쓸어모은다 / 여보! / 얼른 일어나봐! / 내 귓속이 환해졌어'('마당을 쓸며' 전문) '사느라고 애들 쓴다 /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쉬는 날' 전문) 이 짧은 시들은 편하고, 빈틈이 있고, 마음 깊숙이 들어온다.

이걸 염두에 두고, 김용택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때 살았던 전주를 떠나 고향 진메마을로 아예 들어와 살고 있지요. 여기 있으니 편해. 별별 채소 다 키우고 별로 밖에 나갈 일도 없고 쓸데 없는 번뇌가 사라졌어요. 잘 들어왔어요." 짧으면서 깊게 울리는 그의 시는 이런 조용한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쾌한 문학 나들이의 추억

   
하동 이병주문학관을 찾은 이미도 씨.

이번엔 김용택 시인의 아내 이은영 씨가 이미도 씨를 보더니 반색한다. "선생님이 번역한 영화도, 선생님께서 쓰신 책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러자 금세 이미도의 영화 이야기가 시작된다. "스티브 잡스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를 만들면서 모토를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라고 했죠. 이게 참 놀라워요. 시의 정신과도 통하는 것 같아요." "인상 깊었던 영화 한 편만 꼽는다면? '굿 윌 헌팅'입니다. 치유와 희망을 보여주죠.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이 하버드대학에 다니던 시절 각본을 쓴 작품이라 문장도 훌륭하죠."

김용택 시인의 집 앞 느티나무 곁의 국숫집에서 밥을 먹고, 김 시인과 함께 필봉농악전수관에 필봉농악 공연을 보러 갔더니 이날이 올해 마지막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 김용택 시인을 사회자가 소개하자 관객들이 환호했다. 김 시인은 이어 부산에서 온 심심찮은 문학기행단도 소개했다. 많은 게 그렇게 우연히 꼬리에 꼬리를 물며 흥겹게 이어졌다.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10월 1일) 준비에 바쁜 이병주문학관과 관광객이 밀려든 하동군 북천코스모스메밀축제 현장, 사천 다솔사까지 발걸음은 그렇게 이어졌다. 이미도 씨는 이병주문학관에서 "문학과 예술의 세계를 열어주신 이병주 작가의 문학관에 비로소 오게 됐다"며 기뻐했다. 조갑룡 원장이 말했다. "오래 기억에 남을 문학기행이군요. 한 번 더 갑시다." 그가 덧붙였다. "이번엔 곽재구 시인 만나러 순천만으로 가 볼까?" 벼가 황금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일행은 다음 문학기행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가을은 나들이에 좋은 계절이었다.

조봉권 기자 bgj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