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초 [양산], '신라 영토'였나?
'가야 땅'이었나?
450년 이후엔 신라 땅 확실시, 이전 기록은 없어 미스터리로
- 최근 가야유물 출토 잇따르며
- 실체놓고 역사학계 의견 분분
- 시, 당시 상황 규명 용역 나서
서기 5세기 중엽 이전 경남 양산은 신라 땅이었을까, 아니면 가야 영역이었을까.
양산시가 역사학계의 의견이 분분한 이 같은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한 전문기관 용역을 시행할 계획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시는 오는 9월 관련 용역을 발주해 올해 말 결과물을 받을 예정이다.
이번 용역이 주목받는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서기 450년(5세기 중엽) 이전 양산의 역사 실체를 규명한다는 점이다.
학계에서는 신라 충신 박제상이 삽량주(양산의 옛 지명) 태수로 재직한 서기 450년 이후는 각종 문헌과 발굴 유물 등 사료로 볼 때 양산이 신라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5세기 중엽 이전 역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 문헌이나 유물·유적 등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그 당시에도 양산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설이 있는 반면 인제대 이동희 교수 등 일부 사학자는 출토된 토기 등 유물로 볼 때 3~4세기 당시 양산은 가야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양산과 가야의 연관성은 2010년 이후 양산에서 관련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1년 양산 명동 문화재 발굴에서는 3~4세기 당시 김해 금관가야의 대표 유물인 외절구연구배(제사용 특수 토기)와 노형기대 토기가 나왔다.
2013년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문화재 발굴에서는 제철유구(송풍로)가 발견됐다.
이곳에서 나온 철은 3~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 발굴 조사에서 나온 철과 성분이 동일한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에서는 이에 따라 3~4세기 당시에는 양산이 김해 금관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지역의 대표 고분인 북정고분군의 경우 가야시대 묘 형태인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가 발굴되는 등 가야와 신라시대 유물이 함께 출토됐다.
양산시는 용역을 통해 양산의 가야 연관성이 규명되면 이를 근거로 정부의 가야 문화권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시는 가야진사 복원, 도 문화재인 가야진용신제의 국가 무형문화재 승격, 북정·신기·중부 등 3개 사적지 고분군 발굴 등 3개 사업을 가야 문화권 사업에 포함시켜 추진할 계획이다.
양산시 김용기 과장은 “이번 용역으로 5세기 이전 양산 역사의 수수께끼도 풀고 정부의 가야문화권 사업 참여 길도 열 계획이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성룡 기자 sr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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