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잊힌 [부산 영국 공사관]터 찾았다
서구 남부민동 제일아파트 자리, 명예영사관 16일 기념석 제막식
- 국가기록원 보관 옛 사진서 확인
- 주민동의 얻어 담장 허물고 설치
한국전쟁 당시 잊힌 영국 공사관터가 부산서 발견됐다.
영국명예영사관과 부산 서구는 오는 16일 낮 12시30분
남부민동 제일아파트에서 ‘옛 영국 공사관터 기념석 제막식’을 연다고 13일 밝혔다.
13일 김문익 영국명예영사가 부산 서구 남부민동 영국 공사관 옛터에 세워진 기념물의 글귀를 읽고 있다. 서순용 선임기자 |
옛 영국 공사관터를 찾는 것은 지난해 찰스헤이 주한 영국 대사의 제안으로 진행됐다.
한국전쟁 당시 양국의 관계를 되새기는 의미에서였다.
이에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명예영사관은 지난 2월부터 부산 곳곳을 다니며 공사관터를 찾아다녔다.
김문익 명예영사는 “수도청사였던 동아대박물관 주변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서구, 중구, 부산시민공원,
부산대 역사학과, 부산대박물관 등을 직접 방문해 조사했다. 그러다 국가기록원에서 내부 문서를 확인하고
역사학자 김한근 부경근대역사연구소장의 도움으로 옛 공사관터로 추정되는 과거 사진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문서는 1952년 영국공사관저 대상 건물 지정과 명도를 지시하는 국무총리실 내부 문서였다. 1949년 외교를 시작한 양국은 1년 만에 한국전쟁으로 외교 단절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영국은 서울에 있던 공사관을 임시수도 부산으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국무총리실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목조주택을 영국 공사관 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영국 공사관에는 W.G. 그레함 공사, A.H. 버치 일등서기관 겸 영사,
RWB 커닝 햄 중령 무관, D.H. 볼람 2등 서기관 등 4명이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3년간 이곳에 머무르며 인근 감천부대에 주둔한 영국군과 피란민을 지원했다.
영국 대사관은 영국군은 한국전쟁 당시 8만1084명이 참전했고 110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김 명예영사는 “옛 영국 공사관터는 영국이 한국 피란민을 외면하지 않고
외교 관계 지속에 힘쓴 상징”이라고 평가했다.
공사관은 이후 서울로 돌아간 뒤 40년간 사유지였다가 1995년 지금의 제일아파트가 건축됐다.
명예영사관은 서구청과 함께 아파트 주민에게 동의를 얻어
담장을 허물고 기념비 디자인과 어울리는 새 울타리와 기념비를 설치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계기로 부산시가 현재 피란수도 부산 유네스코 등재 추진을 위해
옛 대(공)사관터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민정 기자 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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