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전설 보따리] <25>
'이정헌'공의 혼령
공 인정받지 못한 젊은 장수의 애통함
부산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부산시기념물 제10호인 정공단에 '정발장군비' 왼쪽에 이정헌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좌승지이공정헌비'가 서 있다. |
- 장소: 동구 좌천동
- 왜군으로부터 부산진 지키다
- 장렬히 전사한 조방장 이정헌
- 해골 묻은 사람들 꿈에 나타나
- 자신을 몰라주는 조정에 원망
- 이후 부임해온 첨사 모두 급사
- 증직·표창하니 모든것이 무사
왜군의 침입 조짐이 점점 높아가던 어느 날, 부산진첨사 정발(鄭撥) 장군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일하던 중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받았으나
말이 병이 들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한 이유로 [파면]을 당했다고 아뢰면서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닥쳤는데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호소했다.
정발은 그 젊은이의 기개를 높이 사 자신을 옆에서 보좌토록 했다.
마침내 왜군이 침입하자 그 젊은이는 부산진성 전투에 임하며
"부신진은 우리나라의 관문인데, 부산진이 없으면 영남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우리나라가 안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외치며
정발 장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이정헌(李庭憲·1559~1592)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부산에 첨사가 부임만 하면 어쩐 일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급사하는 변이 잇따랐다.
조정에서는 재차 사람을 뽑아 부산진첨사로 내려보냈으나 부임한 지 며칠 만에 급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관리들이 후임 부산진첨사 되기를 꺼리는 형편이라
조정에서도 하는 수 없어 옛 성(城)을 정성(整城)하여 자성대(子城臺)로 본성(本城)을 옮기게 하고
옛 성지(城址)를 팠는데 동문못(東門池) 속에서 수많은 해골이 나왔다.
마을사람들이 [이 해골들을 모아 자성대 밑에다 묻었더니]
이 마을 한 노인의 꿈에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서
"나는 영천(永川) 조방장 이정헌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정공과 같이 부산진을 지키다가 전사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나의 공로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어 섭섭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서러운 사정을 호소하려고 역대 부산진첨사의 꿈에 나타났더니 하나같이 모두가 소인이라
미처 말도 하기 전에 죽어버리기에 애통함을 참지 못하는 바다"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그 고을에 갑자기 병이 유행하여 [급사자]가 하루에 40여 명이나 생겼다.
이에 꿈을 꾼 노인이 이상하게 여겨 동래부사를 찾아 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당시 [동래부사] 홍명한(재임 1759~1761)은 즉시 이정헌의 공로를 자세히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이 보고를 받은 임금은 이정헌을 기특하게 여겨 대신들에게 의논케 했다.
대신들은 이정헌이 국토를 지킬 직책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하다 순절하였으므로 증직(贈職)하였다.
그의 집 대문과 마을 입구에 의롭고 충성스러운 행동을 표시하며
마을사람들의 본보기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정했다.
이정헌에게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증직하고 그의 순절을 표창하니,
죽은 지 16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그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홍명한 부사는 [몸소 이곳에 와서 기치(旗幟)를 갖추고 군고(軍鼓)를 울리고
제사를 크게 지내며 혼령을 위로했더니] 그 후로부터는 모든 것이 무사해졌다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맞아 항전하다 순절하였지만,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없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애통한 마음을 전해주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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