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부산의 전설 보따리] <35> 윤공단의 '순란사민비'와 윤백련

금산금산 2014. 11. 1. 10:19

[부산의 전설 보따리] <35>

윤공단의 '순란사민비'와 윤백련

 

 

격파 당한 왜선서 일본복장의 조선 소녀가…

 

                                                

 

부산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객관의 동쪽에 위치한 부산시기념물 제9호 윤공단.

 

 

 

- 장소: 사하구 다대동
- 14세女 가족 잃고 잡혔다가
- 이순신 장군이 구출해내
- 임진왜란때 다대포성 함락
- 첨사 윤흥신공 기린 윤공단
- 순란사민비·의사윤흥제비도



조선 선조 25년,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다음 날인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후 다대포성공격했다.

15일 우리의 민관군은 힘을 합쳐 왜군과 싸웠으나 끝내 다대포성도 함락되었다.

다대포성 싸움에서 전사한 첨사 윤흥신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윤공단(사하구 다대동 산 24·부산시기념물 제9호)에는 첨사순절비가 서 있고,

그 왼쪽에는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가, 오른쪽에는 의사윤흥제비가 있다.

이 순란사민비는 다대포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될 때 성과 운명을 같이한 다대포 백성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834년 8월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동안 비문이 없어 다대포 싸움의 상황을 알 길이 없었지만

그 답은 '이충무공전서'에 나와 있다.

첨사순절비 왼쪽에 서 있는 안타까운 사연의 순란사민비(殉亂士民碑).

이 비석의 주인공은 윤백련(尹百連)의 아버지

윤곤절(尹昆節)어머니 모론(毛論)이다.

1592년 4월 15일 다대포성을 점령해 경상도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한

왜군은 이후 도적떼로 변해 먼저 김해에서 이틀 동안 분탕질을 했고,

이후 거제도로 건너가 5월 7일 옥포에서 또다시 노략질과 분탕질을

일삼았다.

이 즈음 왜군의 상황을 척후장 김완으로부터 보고받은

이순신 장군의 연합함대는 옥포 해안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쳐

선창에 정박해 있던 왜선을 향해 포격을 가해 26척의 왜선을

단숨에 격파했다.

이른바 옥포해전에서 첫 승전을 거뒀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사람들이 잡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왜선을 샅샅이 수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옥포해전에 우부장으로 참가한 보성군수 김득광은 그가 격파한

왜선의 선창에서 일본 옷을 걸치고 단발하여 마치 일본사람처럼 보이는

처녀 아이를 찾아내 이순신 장군에게 조사 보고서를 올렸다.

이름은 윤백련, 나이는 14살, 주소는 동래부 사천면 다대리,

고향은 동래부 동래읍 오장리.

아버지는 다대포진 수군 윤곤절이고 전쟁 중 행방불명 되었고,

상민인 어머니 모론은 다대포성에서 죽었다.

윤백련은 다대포진에 난리가 있기 전날 첨사로부터 피난 명령이 내려와 윤씨내(다대포의 옛 지명)를 따라

앞산 안골샘 숲속에 숨어 있었다가 이튿날 잠잠해지자 오빠 복룡과 성안 집으로 돌아왔다.

군인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성에 남았던 엄마는 불탄 집 안에서 죽어 있었고 출전한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어머니 시신을 수습한 후 남매는 동래에 있는 할아버지 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가 부산포 근처에서 왜군을 만나

오빠는 겨우 도망을 쳤고, 윤백련은 왜군에게 잡혔다.

이후 왜군에게 매일같이 배에서 수도 없이 몹쓸 짓을 당하던 중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결국 구출되었다.

보고서를 읽고 난 이순신 장군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한 후 부하들에게

"이 아이를 순천이나 보성으로 보내 관리들에게 특별히 보살피게 했다가 온전히 고향으로 보내주라"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다대포 처녀 윤백련은

'임진왜란 정신대'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그곳 보성 땅에서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윤공단은 영조 41년, 1765년 다대첨사 이해문이 윤흥신공이 순절했다고 전해지는 다대포객관의 동쪽에

설치했으며, 1970년 아미산 기슭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현재 제향은 다대동 동민들이 매년 음력 4월 14일 지내고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