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부산기업 스토리] '한국생사'

금산금산 2015. 3. 7. 11:04

한국생사는 한때 30개 계열사를 거느렸던 토착 실크 재벌이었다.

1937년 일본인 신류조가 세운 아사히견직이 그 전신이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보급할 견직물과 군수용 피복을 주로 만드는 회사였다.

부산 동래구 거제동(현 경남 현대아파트 자리)과 부산진구 부전동(옛 부산진구청 뒤편)에서

종업원 300여 명 규모로 가동되던 한국생사는 8·15 해방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민족자본으로 편입되었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가면서 미군정 산하 적산기업으로 접수된 한국생사는

6년여간 공기업 체제로 운영되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민간에 불하됐다.

이승만 정부의 민영화 조치로 정상 궤도에 오른 한국생사는 전쟁 특수를 타고

군수용 피복을 납품하는 특혜로 엄청나게 호황을 누렸다.

생필품이 극도로 부족하던 시장 상황까지 겹쳐 출고가격의 두 배에 달하는

웃돈을 받고 견직물을 출고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그렇게 초기자본을 축적한 한국생사는 1960년대에 접어들어 천연 비단을 만드는 제사업에 진출하면서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밀양, 산청, 대구, 춘천, 원주 등 전국 곳곳에서 16개 제사공장을 운영할 만큼 사세 확장을 거듭했다.

연간 매출액이 일본 가다쿠라에 이어 세계 2위에 등극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세계 2위 등극한 토착 실크재벌
화학섬유에 밀려 역사 뒤안길로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생사도 1966년 말 나일론 테트론 등

화학섬유들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자연산에 버금가는 인조양단이 등장하면서 설자리가 더욱 좁아졌다.


품질고급화 전략에도 한계에 부딪힌 한국생사는 1985년 주력 생산시설인 거제리 공장을 매각하면서

 자체 브랜드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밀양과 산청, 동두천 등에 있던 3개 공장을 중심으로 일본 등 해외에서

주문받은 물량을 OEM방식으로 생산하는 하청회사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한국생사는 중국 현지 공장을 건립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끊임없이 재도약의 기회를 노렸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5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때 세계 2위 천연섬유업체였다는 전설만 간직한 채.

 

 

 

정순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