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부산기업 스토리] '삼화 고무'

금산금산 2015. 3. 14. 14:07

[부산기업 스토리] '삼화 고무'

 

 

 

 

 

 

 

                                 

 

 

 

 

 

 

삼화고무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영남지역에 있던 13개 신발업체들을 합병해 만든 회사였다.

8·15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에 접수되었다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경상남도 산하 공기업으로 변신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대구영업소를 운영하던 김예준 씨에게 불하되었지만 그 앞길은 순탄치 못했다.

오너인 김 씨가 자유당 국회의원 후보 경선에 나서 두 번이나 낙선하는 등

회사 경영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삼화고무는 1958년 한국생사 그룹으로 넘어가 자동차 타이어를 생산하는 회사로 변신했지만

이 역시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삼화고무가 생산한 타이어의 품질이 당시 암시장을 통해 흘러나온 미군용 타이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조악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만화슈즈로 성장 발판
자체 브랜드보다 OEM 위주 한계

 

 

 

 



이처럼 실패를 거듭하던 삼화고무가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은 것은 1965년,

신발업체로 환원해 만화슈즈를 출시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 니폰고무와 기술 제휴를 맺고 국내 특허를 받은 만화슈즈가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다.

이후 1970년대 들어서는 나이키와 리복 등 세계적인 바이어들과 손잡은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으로 고속성장 가도에 올랐다.

 당시 신발산업이 수출 효자 품목 1호로 자리를 잡는 데

삼화고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공헌도가 높았다.


그런 삼화고무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1978년 2차 오일쇼크 때였다.

자원민족주의 열풍으로 생고무 가격이 3배 이상 폭등한 것이다.

같은 시기 미국이 신발 수입쿼터제를 도입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1980년대 접어들어 동남아국가들이 저임금을 무기로 OEM시장에 대거 뛰어들면서 더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자체 브랜드 개발을 등한시하고 외연 확장에만 전념했던 전략에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다 만성적인 노사분규에 시달리던 1991년 태풍 글래디스호로 금사동 공장이 침수되는 불운까지 겹쳐

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7월12일 주식 상장이 폐지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부산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등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992년 9월 21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발공장 큰애기 사연과 함께...

 

 



 
논설위원   정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