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 역사 길
궁핍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이중섭과 마사코의 절절한 노래
▲ 동구 산복도로 마사코 전망대. 이중섭이 가족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글이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정대현 기자 |
부산 동구 범일동 옛 보림극장에서 출발해 산복도로로 이어지는 길은
한국 근현대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길이다.
이 지역은 부산에서도 변화가 없는 노쇠한 지역이자 낡은 풍경을 가진 지역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변천 과정을 간직한 풍경은 그 자체로 큰 자산이자 가치가 된다.
최근 몇 년 산복도로 르네상스와 이바구길 조성을 통해 지역이 가진 역사성과 삶의 유산을 다듬었지만
아직은 모르는 이가 많다.
부산 동구 이바구길을 조성했던 정영석 소민아트센터 관장(전 동구청장)은
"부산 동구는 나라가 편할 때는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대문 구실을 했고,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는
나라를 지키는 빗장이 되어준 곳이다. 또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도약한 고된 세월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고 소개했다.
이번 회에선 부산 동구 범일동 옛 보림극장에서 출발해 이중섭 거리와 마사코 전망대,
안용복 부산포 개항문화관, 부산진교회와 정공단으로 이어지는 길을 컬처 로드로 제안한다.
천재화가 이중섭 자취 남은 거리·전망대
대중문화사 한 획을 그은 옛 보림극장
안용복 장군의 기개 담은 개항문화관
근현대사의 애환과 충정 깃든 장소들
■ 이중섭의 애절함과 한국 대중문화의 한 자락
산복도로 역사길의 시작은 옛 보림극장이다.
극장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지금은 마트와 작은 화장품 가게로 변해있다.
보림극장 인근 지역은 6·25 피난의 역사가 함께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현재 한성 기린 아파트 자리에 교통부가 이전해왔고 이 지역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당시 피난민들은 현재 성북 고개를 '아리랑 고개'라고 부르며
고향으로 갈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경제 성장이 강조되던 시대, 이 지역에 고무·신발 공장이 생기며 여공들이 넘쳐난다.
보림 극장 뒤쪽 골목이 '똑딱거리'로 불린 계기가 된다.
당시 여공들은 얼른 돈을 벌어 힘겨운 생활을 벗어나고 싶었고 그녀들은 하이힐의 구두굽 소리인 '똑딱'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희망을 노래했다.
사실 보림극장은 한국 대중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역사적인 곳이다.
코미디언 서영춘을 비롯해 하춘화, 남진, 나훈아 리사이틀 쇼가 성황리에 펼쳐졌고
한국 가요계의 제왕, 조용필도 이 곳에서 공연했다.
가수 하춘화 씨는 지금도 "부산 범일동 극장에서 공연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극장으로 몰리는지 '극장이 터지겠다'는 말을 했다.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부산 공연을 할 때는 늘 애틋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다.
보림극장 옆 골목을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특별한 곳이 펼쳐진다.
거리 초입에 있는 붙어있는 인물, 한국이 낳은 천재 화가 이중섭이다.
이중섭 거리의 시작이다.
관람객이 안용복 부산포 개항 문화관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은 이중섭 거리. 정대현 기자 |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이중섭을 보았다/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동경에서 아내가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의 시 '내가 만난 이중섭'이다.
한국의 천재 화가 이중섭에게 부산은 그의 40년 인생 희로애락이 모두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중섭은 부산으로 피난 왔고
지금의 동구 범일동에서 생활했다.
고향에서는 부자였지만 피난처 부산에선 아내와 두 아들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내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고 부산에 홀로 남은 이중섭은
미군 부대에서 버려진 담뱃갑 속 은박지를 떼어내 그림을 그렸다.
김춘수 시인의 표현대로 이중섭의 시선은 언제나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올 바다로 향해 있었고
범일동은 천재 화가의 절절한 그리움을 품은 곳이다.
이중섭 거리는 현재를 사는 주민들과 함께 숨쉬고 있다.
돌담과 계단, 대문에 그의 그림들을 만날 수 있고 아내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렇게 이중섭에 흠뻑 빠져 길을 올라가면 산복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마사코 전망대가 있다.
마사코 전망대가 문을 열기 전 마사코의 전기를 쓰고 있는 일본인 부부가 동구청을 찾은 적이 있단다.
일본에 생존해 있는 마사코 여사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때는 범일동 시절이다.
나는 이중섭과 범일동 1497번지에 살았다"며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이중섭과 마사코의 사랑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
■ 독도 지킴이 안용복 장군과 정발 장군의 충절
마사코 전망대에서 20여 분 걸어가면 안용복 부산포 개항문화관에 도착한다.
600년 부산항의 개항 역사와 안용복 장군의 일생을 만날 수 있다.
부산항은 일본과 외교 임무를 맡았던 조선 통신사가 배를 타고 드나들던 우리 나라 뱃길 외교의 시원지이며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장군이 출정했던 곳이자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이다.
서양 문물이 처음으로 상륙한 곳도 이곳이다.
이 부산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안용복 장군이다.
조선 숙종 때 홀홀단신 배를 띄워 무자비한 일본 막부와 협상을 했고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이 맞다, 일본 어부의 출어를 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그다.
그런데 사실 그는 장군이 아니라 노를 젓는 수병이었다.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말을 익혔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해낸 것이다.
안용복 개항문화관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부산 초기 교회 건축의 하나인 부산진교회와 부산의 3·1운동 시발점 일신 여학교를 만난다.
그 옆으로 부산이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장군 흔적이 있다.
정발 장군을 모신 사당, 정공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진성을 지키다 순국했고 정공단에는 그의 비와 함께 정발 장군을 보좌했던
이들의 비도 함께 있다.
일제시대에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까지 모두 몰수하였으나,
광복 후 새로이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곳이다.
산복도로 역사길은 사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이중섭과 마사코의 사랑 이야기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 수 있고 아직도 호주 선교회와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는 부산진교회와 왕길지 기념관도 그렇다.
이 공간들을 활용하는 방안이 적극 연구되어야 한다.
김효정 기자
공동기획 부산일보사·동아대 디자인환경대학 지역유산재생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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