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역사길
왜구 막던 최전방 수군 요충지 … 걸음마다 1천500년 문화유적
▲ 돌로 쌓은 바깥쪽 성벽만 남아있는 기장 읍성 모습. 정대현 기자 |
멋진 해안 풍경과 맛집, 대변 멸치 축제로 대표되는 기장은 사실 역사, 문화적으로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1천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기장군청 문화관광과 허재혁 박사는 "기장은 한반도를 노리던 외세 침범을 막는 최전방이었고
대외 전초기지였다.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행정과 교육 도시로서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컬처로드는 대변항의 기장 척화비를 출발해
죽성리 왜성-죽성리 해송-황학대-어사암-장관청-기장읍성-기장읍성공덕비군-기장향교로 이어진다.
기장군청 허재혁 박사와 기장문화원 황구 향토사 연구실장이 함께 동행해 도움말을 주었다.
■ 한반도의 최전방을 지키던 군사 요충지
1800년 초반에 제작된 기장 지도를 보면, 대변항 주위로 주사(해군기지), 전선이 그려진 것을 발견한다.
기장 지역이 수군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문헌에는 기장의 목구멍이 대변항이므로 대변항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한반도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시대 이래 군사·교육도시 위상
해안 절경 이어진 곳곳엔 척화비·왜성
전국서 가장 많은 공덕비도 모여 있어
복원 끝낸 장관청·기장향교 눈길
대부분 유실된 기장읍성 복원 예정
대변항은 과거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 기지였으므로
이 지역 사람들의 투쟁과 독립 정신은 예로부터 유명하다.
대변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서 있는 기장 척화비가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원래 대변방파제 안쪽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바다에 던져졌고
해방이 되어 마을 청년들이 척화비를 건져서 다시 세웠다.
척화비 내용은 다른 곳에 남아 있는 것과 같으나 기장 척화비에는 재미난 비밀이 숨어 있다.
척화비 비문을 자세히 보면, 원래 비문 중간 중간에 한글이 연하게 각자되어 있다.
후세에 한글 조사를 붙여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양이침범(洋夷侵犯)'이라는 한자 밑에 '에'라는 한글 조사를 붙이는 식이다.
척화비에서 기장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죽성리 왜성에 도착한다.
마을 이름을 따서 두모포 왜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건축물은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쌓은 성 중 하나이다.
당시 동원된 인부 수가 약 3만 3천 명 정도이고 정유재란 때에는 왜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기도 했다.
이 왜성에 올라서면 두모포만 전체를 아우르는 해안 절경을 만난다.
임진왜란 마지막까지 왜군이 저항했고
특히 기장과 경남 일대 도공들이 이 왜성으로 끌려와 결국 왜군들과 함께 일본까지 가게 된다.
죽성리 왜성의 건너편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죽성리 해송이 있다.
6그루의 나무가 모여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는 노거수로
마을 사람들이 음력 정월 대보름날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를 지낸 곳이다.
왜성에서 내려와 바닷길로 접하면 황학대와 어사암을 만날 수 있다.
황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아 '황학대'라는 불리는 이 곳은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유배생활 중에 고산은 이 곳을 매일 찾았다고 전해진다.
황학대를 지나면 기장 사람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어사암에 도착한다.
조선 고종 20년 양곡을 실은 배가 마산포로 가다 기장 앞바다에서 침몰했고
굶주리던 주민들은 물에 빠진 볏섬을 건져 먹는다.
당시 조정에서 어사를 파견해 직접 진상을 조사할만큼 큰 사건이었다.
어사로 파견된 이도재는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죽을 위기에 처한 주민을 살린다.
어사암에는 지금도 '이도재'라는 한문 글자와 당시 주민을 대표해
이 어사를 설득한 기생 월매의 이름도 찾을 수 있고
기장읍성 옆 공덕비군에 이도재에게 감사를 전하는 공덕비가 남아 있다.
■ 행정과 교육,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기장
기장읍쪽에서 만나는 기장읍성은 현재 바깥쪽 돌로 쌓은 성벽만 남아있다.
그것도 대부분 유실돼 전문가나 지역 사정에 밝은 사람과 같이 가지 않으면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낙안읍성처럼 성의 형태를 기대했다면 실망스럽다.
기장군청과 부산시가 의욕적으로 기장읍성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거주 공간이 많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원형복원을 마친 기장 장관청. |
그럼에도 여기가 기장 읍성 지역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100% 원형 복원을 끝낸 장관청이 있기 때문이다.
기장 장관청은 동래부의 장관청, 군관청과 함께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많지 않은 군관용 관아 건물이다.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사 연구실장은 "동래에 비해 휠씬 규모가 작은 기장에 장관청이 있었다는 건
기장이 여러모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장관청은 조선 중기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하며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현재 원형 복원 공사가 끝났으나 경비 예산을 편성받지 못해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담이 낮아 밖에서 장관청의 안쪽 모습을 휜히 볼 수 있다.
장관청 옆쪽의 구불구불한 돌담길은 이곳이 기장 읍성의 내부 마을이었다는 걸 알 수 있게 한다.
전국 사진 작가들이 돌담길을 촬영하기 위해 많이 찾고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산책하는 재미도 남다르다.
기장초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틀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공덕비가 모여있는 기장 공덕비군이 나온다.
기장현에 부임한 관찰사와 어사, 현감, 군수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철비석도 남아있다.
민가의 숟가락, 젓가락까지 수탈했던 일제가 기장 큰 철비석을 가져가지 못했다는 건
기장이 얼마나 항일투쟁이 강했던 곳임을 짐작하게 한다.
공덕비군 옆으로 세종대왕 시절 뛰어난 건축기술을 느낄 수 있는 조선 초기 성벽이 완벽하게 남아있으니
꼭 돌아보길 권한다.
기장 향교. |
기장 역사길 탐방의 마지막은 기장 향교이다.
변방 요새로 인식되던 기장에 향교가 있었다는 건 동래와 함께 기장이 부산 교육의 중심지였다는 걸 말해준다.
기장 향교를 중심으로 이어져 오던 기장의 영남 유학 맥은 일제시대에 빛났고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다.
기장 향교는 선비교실, 예절교실, 유림교실, 인성교육 등
평일과 주말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1년 1만 명 이상이 찾고 있다.
21세기 여전히 가치를 이어가는 교육 기관인 셈이다.
김효정 기자
공동기획 ·동아대 디자인환경대학 지역유산재생연구팀
'환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 컬처로드 연다] 3부 '안창마을' (0) | 2015.04.19 |
---|---|
[부산 컬처로드 연다] '3부 삶과 함께하는 길' 범일동 매축지 마을 (0) | 2015.04.11 |
[부산 컬처로드 연다] 2부 '역사와 함께하는 길' 산복도로 역사 길 下 (0) | 2015.03.28 |
[부산 컬처로드 연다] 2부 '역사와 함께하는 길' 산복도로 역사 길上 (0) | 2015.03.21 |
[부산 컬처로드 연다] 2부 '역사와 함께하는 길' 부산 근대무역·금융 태동 길 (0) | 2015.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