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부산 컬처로드 연다] '3부 삶과 함께하는 길' 범일동 매축지 마을

금산금산 2015. 4. 11. 11:45

범일동 '매축지 마을'

 

 

 

 

 

"더 살면 뭐 하겠노"하던 할매가 "내일 또 뭐 만들까" 살맛 찾은 동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웃을 그리워했다.

이해관계 없이 함께 삶을 나눌 '우리'를 찾아 나섰다.

아파트로 쪼개진 도심 속에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공동체를 발견했다.

 '부산 컬처로드 연다'의 3부에서는 '삶과 함께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골목골목을 엮어 사람 사는 마을을 만들어 낸 매축지 마을, 안창마을, 반송 희망세상 등지를 구석구석 살펴본다.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 4번 출구에서 나와 21세기라파병원을 등지고 굴다리 밑 지하도로를 건넌다.

다리 하나 지났을 뿐인데 성호슈퍼와 양화점의 모습이 시간여행을 온 것 같다.

두 가게가 20세기 동네인 매축지 마을에 온 것을 알린다.

골목을 지나쳐 기찻길을 통과하는 다리를 건너면 범일동 매축지 마을이 나온다.

비좁은 골목골목에 들어선 집들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시멘트벽으로 용케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이사이에 일제강점기 적산가옥도 눈에 띈다.

마을 입구에서 교회 방면으로 걷다가 나무판자가 쌓인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리마을 사랑방 마실'이 나온다.

 

 

 



골목골목 용케도 세월을 견뎌온 집들
주민·시민 단체·사회적 기업 합심
배우고 나누는 사랑방도 만들었어요
가난과 낙후 딛고 더불어 사는 마을
도시철도 좌천역 내려 시간여행 오세요

 

 

 




■ 공동체를 묶어주는 세 공간


'우리마을 사랑방 마실'은 2011년에 문을 열었다.

큰 공간은 아니지만 책을 빌릴 수 있는 '작은도서관',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 부엌,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와 책상으로 이루어졌다.



할머니 두 분이 겨울 옷 한 무더기를 가져와서 "혹시 입을 사람 있으면 주라"고 하면서 놓고 간다.

4살 연진이 어머니가 "잠깐 외출한다"며 연진이를 맡기고 간다.

 


 

마을 사람들이 오며 가며 들르는 '우리 마을 사랑방 마실'.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까지 2년이 걸렸다.

 

 

추운 날, 더운 날, 비오는 날엔 '마실'을 찾는 발걸음이 많아진다.

'마실'은 동구쪽방상담소가 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빈집 세 채를 헐고 보수해 만들었다.

처음 2년 동안은 "돈 들여서 뭐 하

러 지어놨노"라는 눈 흘김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활동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추운 날, 더운 날 여기서 쉬세요. 언제든지 편하게 오세요"라고

권유하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다녔다.

커피도 나누고 , 국수 나눔 행사도 연다.

맞은편에 위치한 통영칠기사 박영진 사장의 후원으로 국수 나눔 행사를 여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여

국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꺼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도서관에서 손자들 그림책을 빌려가시던 할머니들이

동구쪽방상담소의 김수미 활동가에게 "나도 한글을 읽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동부경찰서가 매축지 마을에 청소년공부방을 만든다는 계획을 알게 된 김수미 활동가가

"매축지 마을엔 중·고등학생이 없으니 할머니 한글교실은 어떻냐"고 동부경찰서에 제안해서

의무경찰들이 선생님이 된 할머니 한글 교실이 생겼다.


매주 화요일 '마실'에선 한글 수업이 열렸다.

한글을 익힌 할머니들은 슈퍼에서 상품을 고를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한다.

한글을 배우기 전에는 주인이 골라 주거나, 비슷한 모양의 상품만 사야 했었다.


관계 맺기는 자원이 된다.

주민이 모여서 의사표시를 하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공간은 그 출발점이다.

 


'마실'에서 나와 골목길을 따라 쭉 걷는다.

집마다 세면시설이 없는 매축지 마을 집들의 특성상 대부분의 주민이

달 목욕을 끊는 성남탕을 지나 걸으면 매축지 문화원이 나온다.


매축지 문화원은 지난해 3월 동구청이 리모델링하여 연 곳이다.

매축지의 역사를 담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범일5동에서 나온 직원이 관리하고 있다.

'마실'보다 크고 넓다.

'마실'이 앉아서 수다를 떠는 거실이라면 매축지 문화원은 넓고 쾌적한 마당이다.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의경이 마을 주민들에게 체조를 가르치고, 매축지 마을 옆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제빵사가 재료를 준비해 주민들에게 쿠키 굽는 수업을 연다.

쿠키 판매 수익은 모두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2014년 9월부터 10월까지 한지공예로 인형을 만들었고, 여기서 만든 인형은 부산비엔날레에 초청받은

일본 큐레이터가 '할머니 아트카페'로 다듬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참가한 할머니 한 분은 "예전에는 '더 살면 뭐 하겠노,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라고 했지만

이런 것도 만들고 할수록 하루하루가 금방 가니까 '내일 또 뭐 만들지?'하는 기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렇게 관계 맺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시민단체의 활동, 관의 지원과 관심, 주민들의 참여가

고루 갖추어져야 한다.

공동체를 만들어 유지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눈에 띄는 성과가 없기에 관의 지원도 일시적이고,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2∼3년만 꾸준히 활동하면 신뢰의 동력을 얻은 공동체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화원을 나와 대빙고 냉동창고 방향으로 걷다 보면 정다방이 나온다.

이곳도 빈집을 활용한 공간으로 1층은 외부 방문객들에게 커피를 팔고, 2층은 화가가 입주해 그림을 그린다.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외부인들이 오면 커피를 판매한다.

가격이 정해진 건 아니고, 자율적으로 받는다.

매축지 마을에 상주하면서 출판, 기획을 담당하는 사회적 기업 인사이트영에서 만든 책도 팔아

커피숍 수익을 보전한다.


정다방이 있기 전까지 할머니들은 진시장 일대, 좌천로 거리에서 폐지를 주웠다.

위험하고, 힘든 노동이었다.

매축지 마을의 가난과 낙후가 상품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변화할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다.

할머니들이 정다방에서 수익을 창출하게 된다면 건강한 복지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 예쁘게 완성된 공동체는 없다

사람이 모이니 싸움도 나고, 친한 사람끼리만 따로 모이기도 한다.

인사이트영을 운영하는 안효득 대표는 "완벽한 공동체는 없다. 공동체는 고정된 완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매축지 공동체는 자리가 잡혔다고 본다. 이제 마을 스스로 자립하도록 하는 게 목표다. 마을에 길고양이가 많고 어르신들이 고양이를 마을 반려동물처럼 생각하셔서 매냥이(매축지+고양이), 말냥이(매축지 마을엔 일제시대 마굿간 터가 있다) 캐릭터를 만들어 여러 수익사업에 접목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마실·매축지 문화원·정다방은 불과 4, 5년 전만 하더라도 방치된 공간이었다.

오래된 빈집이 사람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경찰들이 수시로 와서 점검해야 했던 버려진 집들은 이제 주민들이 모여 앉아 공동화장실 청소 당번을 정하고,

화단 만들기에 쓰이는 스티로폼을 다듬는다.

집 안에 부엌과 거실이 따로 없어도 마을의 부엌과 거실이 있어 제 역할을 한다.


보증금 없이 월세 오만 원을 내는 어르신들이 이웃과 함께 배우고 익히며, 나누면서 지낼 수 있는 곳이

부산 시내에 있을까.


매축지 마을은 90년대부터 재개발 논의가 끊이질 않는다.

지리적으로 부산의 중심이라 업체들도 재개발의 기회만 엿보고 있다.

설령 매축지마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250채의 폐가와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21%를 넘는 이 마을을

시민단체와 관, 사회적 기업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일궈놓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조소희 기자

공동기획 ·동아대 디자인환경대학 지역유산재생연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