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열풍과 빅히스토리
인류사에 대한 통쾌한 통찰…'빅히스토리' 바람 불어올까
서기 150년께 제작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 '사피엔스'는 이같이 다채로운 자료를 활용해 인류와 우주에 관한 인식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 |
- 이스라엘 교수의 인문서적
- 인류 빅히스토리로 세계적 반향
- 생생한 언어와 소통하는 문체
- 우주·생명·인류 통찰력 발휘
- "개체의 고통·행복 따위는
- 아랑곳하지 않는 게 진화"
- 농업혁명 '최대의 사기'로 봐
- 호모 사피엔스 종말 예고하기도
- 636쪽 한국어판도 호응
- 인문학 글쓰기에 갈증 여전
- 지평 넓히는 계기되길
과학전문번역가 조현욱(59) 씨는 14일 제주대에서 명사 초청 특강을 했다.
특강을 주최한 제주대 교수회가 요청한 주제는 '빅히스토리와 사피엔스'였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40) 박사의 저서 '사피엔스'(김영사)를 그가 번역해
지난해 11월 펴낸 점이 계기가 됐다.
뇌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강연과 저술로 유명한 KAIST 김대식(47) 교수는
지난달 '사피엔스' 국내 출간 기념 강연회를 서울 교보생명 컨벤션홀에서 했다.
앞서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은 50주년 기념전을 '사피엔스' 내용을 고고학 유물과 현대 예술로
표현하는 'Brief History of Humankind'로 기획해 지난해 5월 1일부터 올해 1월 2일까지 열었다.
인도네시아 플로렌스 섬에서 발견된 1만8000년 전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화석. 키가 작아 '호빗족'이라는 별칭이 붙은 이들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피엔스'는 2011년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14년 영어판이 영미권에 깔린 뒤 30개 언어로 번역돼 "20개국 이상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유발 하라리가 한국어판 서문에 밝힌 내용).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이크 저커버그가 지난해 6월 이 책을 '저커버그 북클럽'에서 함께 읽을 책으로 정해 관심이 또 쏠렸다.
636쪽에 달하는, 벽돌처럼 두꺼운 한국어판도 올해 1월 첫 주 교보문고
종합 8위를 기록했다.
이 기간 1~10위 가운데 본격 인문서적은 사실상 '사피엔스'뿐이다.
호응이 뜨겁자, 급기야 저자 유발 하라리 방한계획도 잡혔다.
김영사 강지혜 차장은 "오는 4월 한국 중국 대만을 방문하는 아시아 투어에 나선다. 한국에는 4월 25일 들어와 강연 등으로 독자와 만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갓 40세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누구며
'사피엔스'는 어떤 책인가? 600쪽 넘는 인문학책은 왜 이런 열풍을 일으키는가.
■ 40세 소장 학자의 화제작
유발 하라리 |
"빅히스토리죠."
조현욱 번역자는 유발 하라리와 '사피엔스'가 학문 영역에서 위치한
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객원 과학전문기자를 지냈고, 현재
의료 IT기업 라이프시맨틱스 이사이다.
그는 빅히스토리를 "우주가 생긴 빅뱅(137억9800만 년±370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우주·생명·인류의 역사를 통합학문의 방법으로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체계"라고 설명했다.
빅히스토리는 호주 맥쿼리대 데이비드 크리스천 박사가 창시했다.
크리스천 교수가 1989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
크게 주목받았다.
2011년에는 빌 게이츠가 이 학문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고
거액을 후원하면서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크리스천 교수의 주요 저서 '거대사'는 2009년, '시간의 지도'는
2013년에야 국내에 번역돼 한국에서는 역사가 짧다고 할 수 있다.
너무 좁게 또는 너무 잘게 세계를 인식하거나 연구하지 않고, 우주-생명-인류를 통으로 엮어 "광각렌즈로 보듯"(크리스천 교수의 표현) 넓고 크게 인식해 과거를 해석하고 거기서 미래를 내다보자는 게 빅히스토리다.
그중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주머니 속 송곳 같은 기세다.
방대한 우주-생명-인류 역사를 사료와 과학지식으로 맥을 잡아 설명하되, 거기 휘둘리지 않고 하나로 꿰는
'통찰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고, 때로 위트 넘치는 '소통하는 문체'의 힘도 크다.
■ 꿰뚫는 통찰, 소통하는 문체
'사피엔스'는 우주의 빅뱅 이야기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의 성과를 또박또박 제시하면서 지금의 기술과 곧 출현할 가능성이 있는
기술만 갖고도 인류는 스스로 '불멸'에 근접한 비유기물(예컨대 사이보그나 인공두뇌)로
변신할 수 있다고 예측하면서 끝맺는다.
인간이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었지만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 않느냐며 그는 여러 사례를 든다.
이는 사실상 수십 만 년 존재한 인류의 종말이라고 그는 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적 학문을 통합하는 빅히스토리의 틀로 과거를 보고 경향을 추출한다.
예를 들면, 진화의 관점에서 소와 닭은 명백한 성공사례다.
인간과 함께 사는 쪽을 택하면서 개체 수가 엄청나게 늘었고 '번성'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 소와 닭이 더 행복해졌느냐. 천만의 말씀. 7~12년을 사는 닭, 20~25년을 사는 소는 대부분 갇혀서 줄곧 임신 중인 상태로만 살다가 몇 주, 몇 달 만에 대량 도살당하는 지옥에 산다.
1만2000년 전 시작한 농업혁명 덕에 개개인의 고통이 줄고 삶이 나아졌다고?
이건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못 박는다.
200만 년 이상 수렵채취인으로 살면서 인류는 심신이 진화하고 균형 잡힌 영양을 섭취했다.
그러나 농업·정착생활을 하면서 영양실조, 전염병, 노동에 시달렸다.
다만, 인구폭발과 엘리트 출현이라는 변화는 있었다.
■ 인문적 글쓰기 지평 넓히는 계기로
문명에 관한 명저 '총·균·쇠'의 저자인 석학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책을 "참으로 생생한 언어로 썼다"고
표현했다.
하라리의 글쓰기는 확실히 빼어난 데가 있다.
조현욱 번역가는 "오류에 관한 지적이나 반론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학이 바탕인 하라리는 전공하지 않은
분야에 관해서도 방대하게 자료와 성과를 인용하면서 아이디어를 힘차고 매끄럽게 전개한다.
멋진 시각도 있고 위트도 있다"고 했다.
깊이를 갖추고도 독자와 잘 소통하는 인문학 글쓰기에 관한 갈증이 여전한 형편에서 그의 등장은
다시 한국 인문학계의 상황도 돌아보게 한다.
그의 기본 관점은 '진화는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문화와 역사에서도 이런 원리는 통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인간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약하고 까다로운 호모 사피엔스가 번성한 힘은 어디서 왔나.
여럿 중 첫째는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뒷담화용으로 많이 썼다.
뒷담화는 허구를 말하고 믿는 인류 특유의 능력으로 이어졌다.
신화 등의 허구는 힘이 셌다.
허구를 믿고 공유하면서 화폐, 제국 등으로 갈 길이 열린다.
15세기 중세 유럽에서 만든 세계지도는 "우리는 모르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빈틈 없이 꽉 차게 그려진
반면, 과학혁명을 맞은 16세기에는 모르는 곳은 텅 비워놓은 세계지도가 등장한다.
무지를 인정하는 이런 태도는 서유럽에서 과학혁명을 낳았다.
아랍, 중국, 잉카제국에는 이런 관념이 없었다.
과학혁명으로 유럽은 세계를 지배했다.
하라리가 인류 미래에 관해 비관 일변도인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가'를 독자 스스로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도움 되기를 소망한다. 이 같은 이해 덕분에 생명의 미래에 대해 우리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썼다.
이것이 바로 빅히스토리의 지향점이다.
'사피엔스'를 계기로 한국 지성계와 독서계에 빅히스토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예측하는 것도
이런 지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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