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문화현장]
동아대 석당박물관 탁본전
광개토대왕릉비, 탁본만으로 압도하는 기상
- 검은 먹물 든 6m 종이 위
- 희게 드러난 힘있는 필체
- 1905년 본떴다 추정되는
- 4개 면 중 제 3면 석회탁본
- 개교 70주년 특별전시
- 동아대 소장품과 함께
- 불교중앙박물관·직지사 등
- 세 박물관의 50여 점 공개
- 흔히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 성덕대왕신종 탁본도 눈길
"진한 묵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죠?"
신라 시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표면의 세밀한 문양을 보여주는 탁본. |
동아대 석당박물관 정은우(고고미술사학과) 관장이
전시관 초입에서 묻는다.
'편안' 보다는 '압도'였다.
길이 6m에 달하는 종이에 가득한 검은 묵과
정갈하고 힘 있는 필체에 순간 압도당했다.
얼마간은 그냥 바라보게만 된다.
부산 서구 동아대 부민캠퍼스 석당박물관에 전시된
광개토왕릉비 탁본 전이다.
석당박물관은 개교 70주년 특별전으로 내년 1월 22일까지
'광개토왕릉비에서 해인사 대종까지-탁본' 전을 선보인다.
동아대와 함께 불교중앙박물관, 직지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 50여 점을 공개한다.
가장 중요한 전시품인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해 문무대왕릉비, 오룡사 법경대사 부도비 탁본 등은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돼 더욱 의미 있다.
■ 첫 공개 광개토왕릉비 제3면
동아대 석당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광개토왕릉비 제3면의 탁본을 보고 있다. 임경호 프리랜서limkh627@ |
'탁본'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면에서 광개토왕릉비를 맞닥뜨리게 된다.
실제 광개토왕릉비의 제3면은 길이가 5m 37㎝, 너비는 179.3㎝나 된다. 탁본도 길이가 6m에 육박한다.
온전히 펴서 전시할 공간이 없어 천장에 건 뒤
중간부터 끝은 바닥에 눕혔다.
이번에 전시된 탁본은 네 개 면 중 제3면이다.
비석의 뒷면에 해당한다.
동아대는 네 개 면의 탁본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제1면은 공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제3면은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정 관장은 "종이라 훼손 위험이 있고, 너무 거대해
걸어놓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고구려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세기 말이었다.
발견 후 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탁본은 약 110개다.
중국 영토에 있다 보니 1930년대 이후 탁본 뜨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같은 비에서 채탁했다 해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채탁했느냐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동아대 소장본은 1905년께 탁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은 탁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해 학문적 가치가 높다.
탁출 시기를 추정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석당박물관 지강이 학예연구사는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됐을 때 학자들은 제3면 1열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비를 뒤덮은 이끼를 불에 태우는 바람에 비가 까맣게 변해 글자가 보이지 않았던 거죠.
1913년에서야 제1열의 존재가 알려졌어요. 이 때문에 1913년 이후 탁출된 탁본에는 제1열이 나타나지만, 그 이전 탁본에는 제1열이 없습니다. 동아대 소장본은 제1열이 없어요. 그래서 1913년 전에 탁출됐다고
추정하죠. 또한 1905년 탁출된 일본 덴리대학교 소장본과 거의 흡사해 1905년 탁출본으로 봅니다."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진 지 1500년이 흐른 뒤 탁출됐지만 동아대 소장본은 글씨가 선명하다.
비면에 석회를 발라 자획을 확실히 표현한 다음 탁본한 '석회탁본'이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릉비 탁본 대다수는 이 방식으로 채탁됐다.
'석회탁본'은 글자가 선명하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글자를 조작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일본이 가야에 일본부를 두고 우리나라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도 이 과정에서 불거졌다.
제3면에는 '임나일본부설' 내용은 없다. 대부분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이다.
어느 마을 몇 집이 능묘를 지켜야 한다고 깨알 같이 명시했다.
동아대는 어떻게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소장하게 됐을까.
지 학예사는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 있던 일본 장교가 갖고 있던 것을 재일동포 도예가가 사들였다. 그걸 우리 박물관이 1995년 소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탁본 대가' 흥선스님 채탁본
동아대 석당박물관 실내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 모형. 높이 약 6m로 실제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크기다. |
탁본은 실제 유물을 볼 수 없을 때
혹은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을 때 가치를 발휘한다.
유물이 소실돼 탁본 자체가 하나의 유물이 되기도 한다.
이번 특별전에 도 귀한 탁본이 여러 개 있다.
2005년 불타 없어진 낙산사 동종, 북한 개풍에 있는
오룡사 법경대사부도비는 유물을 직접 볼 수 없어 더욱 특별하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빌려와 전시하는 탁본은
탁본의 대가 흥선 스님이 직접 채탁한 것들이다.
흥선 스님의 채탁본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돼
지금은 볼 수 없는 범종 탁본도 있다.
특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 탁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종은 길이 2m 66㎝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다.
탁본도 실제 크기와 거의 같다. 탁본에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섬세한 무늬가 오목조목 나타나 있다.
신라 성덕왕의 극락왕생을 비는 듯 천사(비천)가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향로를 들고 고개를 치켜 올려 무언가 염원하고 있다.
탁본이 평평하지 않고 종의 둥근 모양이 그대로 표현돼 입체적인 점도
이색적이다.
오룡사 법경대사부도비는 북한 개풍 오룡사지에 있는 신라 말·고려 초 승려 법경대사 경유(871~921)의 탑비다.
944년 세워졌으며 북한 국보유적 제153호다.
비문에 보면 법경대사는 나말려초의 혼란을 피해 산 속에서 수행하다 궁예를 만나 후고구려로 들어갔다.
궁예의 폭정으로 후고구려가 멸망하자 왕건의 초빙을 받아 왕사를 지냈다.
이 비는 국내에 전무하다시피한 '궁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 학예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스승님 말씀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부도탑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며 "법경대사부도비 탁본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대, 미국에 한 점씩 있는 것으로 안다. 오래 전 동아대에 들어왔는데 공개를 안 해 외부에서는 소장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휴관일은 월요일과 법정공휴일. 석당박물관 (051) 200-8493
박정민 기자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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