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반짝반짝 문화현장] 동아대 석당박물관 탁본전

금산금산 2016. 11. 11. 22:50

[반짝반짝 문화현장]

동아대 석당박물관 탁본전




광개토대왕릉비, 탁본만으로 압도하는 기상








- 검은 먹물 든 6m 종이 위
- 희게 드러난 힘있는 필체
- 1905년 본떴다 추정되는
- 4개 면 중 제 3면 석회탁본

- 개교 70주년 특별전시
- 동아대 소장품과 함께
- 불교중앙박물관·직지사 등
- 세 박물관의 50여 점 공개
- 흔히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 성덕대왕신종 탁본도 눈길

"진한 묵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죠?"


   
신라 시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표면의 세밀한 문양을 보여주는 탁본.


동아대 석당박물관 정은우(고고미술사학과) 관장이

전시관 초입에서 묻는다.

'편안' 보다는 '압도'였다.

길이 6m에 달하는 종이에 가득한 검은 묵과

정갈하고 힘 있는 필체에 순간 압도당했다.

얼마간은 그냥 바라보게만 된다.

부산 서구 동아대 부민캠퍼스 석당박물관에 전시된

광개토왕릉비 탁본 전이다.

석당박물관은 개교 70주년 특별전으로 내년 1월 22일까지

'광개토왕릉비에서 해인사 대종까지-탁본' 전을 선보인다.

동아대와 함께 불교중앙박물관, 직지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탁본 50여 점을 공개한다.

가장 중요한 전시품인 광개토왕릉비를 비롯해 문무대왕릉비, 오룡사 법경대사 부도비 탁본 등은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돼 더욱 의미 있다.




■ 첫 공개 광개토왕릉비 제3면

   
동아대 석당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광개토왕릉비 제3면의 탁본을 보고 있다. 임경호 프리랜서limkh627@

'탁본'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면에서 광개토왕릉비를 맞닥뜨리게 된다.

실제 광개토왕릉비의 제3면은 길이가 5m 37㎝, 너비는 179.3㎝나 된다. 탁본도 길이가 6m에 육박한다.

온전히 펴서 전시할 공간이 없어 천장에 건 뒤

중간부터 끝은 바닥에 눕혔다.

이번에 전시된 탁본은 네 개 면 중 제3면이다.

비석의 뒷면에 해당한다.

동아대는 네 개 면의 탁본을 모두 소장하고 있는데

제1면은 공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제3면은 이번에 처음 공개한다.

정 관장은 "종이라 훼손 위험이 있고, 너무 거대해

걸어놓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고구려 장수왕 3년(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세기 말이었다.

발견 후 탁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탁본은 약 110개다.

중국 영토에 있다 보니 1930년대 이후 탁본 뜨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같은 비에서 채탁했다 해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채탁했느냐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동아대 소장본은 1905년께 탁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은 탁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해 학문적 가치가 높다.

탁출 시기를 추정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석당박물관 지강이 학예연구사는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됐을 때 학자들은 제3면 1열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비를 뒤덮은 이끼를 불에 태우는 바람에 비가 까맣게 변해 글자가 보이지 않았던 거죠.

1913년에서야 제1열의 존재가 알려졌어요. 이 때문에 1913년 이후 탁출된 탁본에는 제1열이 나타나지만, 그 이전 탁본에는 제1열이 없습니다. 동아대 소장본은 제1열이 없어요. 그래서 1913년 전에 탁출됐다고

추정하죠. 또한 1905년 탁출된 일본 덴리대학교 소장본과 거의 흡사해 1905년 탁출본으로 봅니다."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진 지 1500년이 흐른 뒤 탁출됐지만 동아대 소장본은 글씨가 선명하다.

비면에 석회를 발라 자획을 확실히 표현한 다음 탁본한 '석회탁본'이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릉비 탁본 대다수는 이 방식으로 채탁됐다.

'석회탁본'은 글자가 선명하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글자를 조작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일본이 가야에 일본부를 두고 우리나라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도 이 과정에서 불거졌다.

제3면에는 '임나일본부설' 내용은 없다. 대부분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이다.

어느 마을 몇 집이 능묘를 지켜야 한다고 깨알 같이 명시했다.

동아대는 어떻게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소장하게 됐을까.

지 학예사는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 있던 일본 장교가 갖고 있던 것을 재일동포 도예가가 사들였다. 그걸 우리 박물관이 1995년 소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탁본 대가' 흥선스님 채탁본

   
동아대 석당박물관 실내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 모형. 높이 약 6m로 실제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크기다.

탁본은 실제 유물을 볼 수 없을 때

혹은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을 때 가치를 발휘한다.

유물이 소실돼 탁본 자체가 하나의 유물이 되기도 한다.

이번 특별전에 도 귀한 탁본이 여러 개 있다.

2005년 불타 없어진 낙산사 동종, 북한 개풍에 있는

오룡사 법경대사부도비는 유물을 직접 볼 수 없어 더욱 특별하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빌려와 전시하는 탁본은

탁본의 대가 흥선 스님이 직접 채탁한 것들이다.

흥선 스님의 채탁본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돼

지금은 볼 수 없는 범종 탁본도 있다.

특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 탁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종은 길이 2m 66㎝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다.

탁본도 실제 크기와 거의 같다. 탁본에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섬세한 무늬가 오목조목 나타나 있다.

신라 성덕왕의 극락왕생을 비는 듯 천사(비천)가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향로를 들고 고개를 치켜 올려 무언가 염원하고 있다.

탁본이 평평하지 않고 종의 둥근 모양이 그대로 표현돼 입체적인 점도

이색적이다.



오룡사 법경대사부도비는 북한 개풍 오룡사지에 있는 신라 말·고려 초 승려 법경대사 경유(871~921)의 탑비다.

944년 세워졌으며 북한 국보유적 제153호다.

비문에 보면 법경대사는 나말려초의 혼란을 피해 산 속에서 수행하다 궁예를 만나 후고구려로 들어갔다.

궁예의 폭정으로 후고구려가 멸망하자 왕건의 초빙을 받아 왕사를 지냈다.

이 비는 국내에 전무하다시피한 '궁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 학예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스승님 말씀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부도탑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법경대사부도비 탁본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대, 미국에 한 점씩 있는 것으로 안다. 오래 전 동아대에 들어왔는데 공개를 안 해 외부에서는 소장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휴관일은 월요일과 법정공휴일. 석당박물관 (051) 200-8493

박정민 기자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