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달린 신부에 놀란 신랑, 간첩신고?... 홀아비가 술집 접대부를 새 아내로 맞았는데 뜻밖에 첫날밤 동침을 거절당하고 말았답니다. 사흘째 밤에는 힘으로 승복시켰더니 아뿔사! 신부에게 고추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그는 일어나 경찰서로 달려가, 신부를 간첩이라고 신고하고 말았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8KZSPv6bkU 생활 2024.04.03
映畫역사(조선키네마와 나운규)2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서 세운 영화 제작사였습니다. 중구청에서 출발해 남성여고 입구를 지나면 한성각이라는 중국집이있었습니다. 그 일대가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인 조선 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gb4QPRvhxs 부산 이바구 [바다] 2024.03.30
대마도 특공대(300발의 기관총탄이)4 어둠이 내려앉은 오후 7시께 발포 명령이 내려지고, 순간 300발의 기관총탄이 날아갔습니다 배는 화재에 휩싸이고 30분 후에 침몰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vSJR-PzpE 부산 이바구 [바다] 2024.03.28
밀수 (대마도 특공대) 3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밀수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습니다 호형호제하던 한국필마저 사형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질 판국에 수배자인 이정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은신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특공대 밀수선을 타고 일본 대마도로 밀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bkweKfXg 부산 이바구 [바다] 2024.03.23
映畫역사 이바구(나운규 편)1 나운규는 1902년(고종 39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경찰의 수배를 받게되어 만주 일대와 러시아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tsMhRPUNs 부산 이바구 [예술] 2024.03.21
밀수(대마도 특공대)2 1965년 당시 이즈하라항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평균 30여 척의 밀수선이 정박을 해 놓고 있었고 이들에게 일본 상품을 공급하는 무역상도 20여 개나 되었습니다.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밀수가 극성을 부렸고, 대일 밀무역의 절반 가량인 48%가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즈하라항이 밀수 본거지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밀항자 이정기가 밀수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LzhMeXNV4 부산 이바구 [바다] 2024.03.16
映畫역사, 釜山 이바구2~ 광복동 시가지는 극장의 역사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극장들이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광복로 입구의 상생관, 보래관과 그 뒷길의 태평관, 그리고 소화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화관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_LYYn5UKww&t=8s 부산 이바구 [예술] 2024.03.12
밀수(대마도 특공대)1 1950년 중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간의 민간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달려든 것이, 특공대 밀수꾼이었습니다. 특공대 밀수는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한국경제가 한창 발돋움하려는 1969년까지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를 무대로 한 해상밀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Bjn3nLtIc 부산 이바구 [바다] 2024.03.09
映畫역사, 釜山 이바구1~ 극장에 대한 첫 기록은 1903년의 부산 지도에 행좌와 송정좌의 위치가 나와 있습니다. 행좌, 송정좌, 부산좌를 시작으로 중구에는 수많은 극장들이 들어섰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K15ZwTjOVI&t=1s 부산 이바구 [예술] 2024.03.05
어사 박문수는 왜 부산 명지까지 갔을까 2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이자 최대의 교통로였습니다. 낙동강 소금배 장사를 '배- 장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윤이 배가 남는 장사라는 뜻입니다 하단에서 출발한 소금배는, 여러 편을 거쳐 안동까지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특명사신 박문수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명지도 염전에서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6개월 만에 얻은 소금이 무려 1만8000석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d8ApCEdCo 부산 재발견 2024.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