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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畫역사(조선키네마와 나운규)2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서 세운 영화 제작사였습니다. 중구청에서 출발해 남성여고 입구를 지나면 한성각이라는 중국집이있었습니다. 그 일대가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인 조선 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gb4QPRvhxs

밀수 (대마도 특공대) 3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밀수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습니다 호형호제하던 한국필마저 사형대에서 이슬처럼 사라질 판국에 수배자인 이정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은신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특공대 밀수선을 타고 일본 대마도로 밀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bkweKfXg

映畫역사 이바구(나운규 편)1

나운규는 1902년(고종 39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경찰의 수배를 받게되어 만주 일대와 러시아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GtsMhRPUNs

밀수(대마도 특공대)2

1965년 당시 이즈하라항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평균 30여 척의 밀수선이 정박을 해 놓고 있었고 이들에게 일본 상품을 공급하는 무역상도 20여 개나 되었습니다.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밀수가 극성을 부렸고, 대일 밀무역의 절반 가량인 48%가 대마도 이즈하라항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즈하라항이 밀수 본거지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밀항자 이정기가 밀수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LzhMeXNV4

밀수(대마도 특공대)1

1950년 중반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간의 민간무역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달려든 것이, 특공대 밀수꾼이었습니다. 특공대 밀수는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한국경제가 한창 발돋움하려는 1969년까지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를 무대로 한 해상밀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Bjn3nLtIc

어사 박문수는 왜 부산 명지까지 갔을까 2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이자 최대의 교통로였습니다. 낙동강 소금배 장사를 '배- 장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윤이 배가 남는 장사라는 뜻입니다 하단에서 출발한 소금배는, 여러 편을 거쳐 안동까지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특명사신 박문수는 천혜의 조건을 가진 명지도 염전에서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6개월 만에 얻은 소금이 무려 1만8000석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nd8ApCEdCo

부산 재발견 2024.03.01